조선 중기 성리학자 이언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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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06-17 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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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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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성리학자 이언적
1. 개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여주. 자는 복고, 호는 회재·자계옹. 참군 수회의 손자로, 생원 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로 계천군소의 딸이다.1547년...
조선 중기 성리학자 이언적
1. 개요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로서 본관은 여주. 자는 복고, 호는 회재·자계옹. 참군 수회의 손자로, 생원 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경주손씨로 계천군소의 딸이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 다만 그의 호를 ‘회재’라 한 것은 회암의 학문을 따른다는 견해를 보여주는 것이다.그는 27세 때 당시 영남지방의 선배학자인 손숙돈과 조한보사이에 토론되었던 성리학의 기본쟁점인 무극태극논쟁에 뛰어들어 주희의 주리론적 견해에서 손숙돈과 조한보의 견해를 모두 비판하여 자신의 학문적 견해를 밝혔다. 이때 윤원형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초명은 적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자를 더하였다(1491~1553)
2. 관직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그것은 주희의 주리론적 입장을 정통으로 확립하는 것이다. 이때 윤원형 등이 선비를 축출하는 을사사화를 일으켰을 때 추관이 되어 선비들을 심문하는 일을 맡았지만 자신도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초명은 적이었으나 중종의 명으로 언자를 더하였다(1491~1553)
2. 관직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그는 스승으로부터 뚜렷하게 계승받은 것이 아니요 독자적으로 학문을 수립하였다.1547년 윤원형 일당이 조작한 양재역벽서사건에 무고하게 연루되어 강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63세로 죽었다.
3. 학문
이언적은 조선조 유학, 곧 성리학의 정립에 선구적인 인물로서 유학의 방향과 성격을 밝히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이때 조정에 일강십목소를 올려 정치의 도리를 논하였다. 물론, 이언적은 이 논쟁에서 이기론의 주리론적 견해로서 이선기후설과 이기불상잡설을 강조하였다. 이때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관직에서 쫓겨나 경주의 자옥산에 들어가서 성리학연구에 전념하였다.1537년 김안로 일당이 몰락한 뒤에 종부시첨정으로 불려나와 홍문관교리·응교·직제학이 되었고, 전주부윤에 나가 선정을 베풀어서 송덕비가 세워졌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조·예조·형조의 판서를 거쳐 1545년에 좌찬성이 되었다. 그가 여기에서 벌인 태극의 …(To be continue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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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이조정랑·사헌부장령·밀양부사를 거쳐 1530년 사간이 되었다. 이러한 이우위설의 견해는 이황에게로 계승되는 영남학파의 성리설에 선구가 된다된다.